광신대학교 조직신학교수 고광필(Ph.D)
1.서론
칼빈의 동료 목사인 갈라스 목사는 칼빈을 말하여 탁월하고 경건한 목사로 평가했다.
참으로 중요한 평가라고 생각한다. 칼빈도 목회자는 일급신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오늘의 목회자도 탁월하고 경건한 목사가 되어야 한다. 어느 하나의 미덕을 소유한 자가 아니라 양자를 다 가져야 올바른 목회를 할 수 있다.
주석의 왕이라고 평가받은 칼빈은 참된(유일한) 성경 해석자는 목회자도 아니고 신학자가 아니라 성령(spiritus Dei est verus eius interpres)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가히 혁명적인 선언이다.
성경에서 출발하고, 성경을 통해서 살며, 성경으로 돌아가야 하는 목회자들에게 칼빈의 선언은 성경해석에 있어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다고 생각한다.
2.칼빈 이전의 해석학
칼빈의 이전의 해석학의 주요 흐름은 알렉산드리아를 중심한 알레고리칼 해석과 안디옥을 중심한 테오리아(θεωρια/관찰, 통찰력) 해석을 들 수 있다.
전자는 철학적으로는 플라톤 철학을 선호했고 후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선호했다.
따라서 알레고리칼 성경해석의 핵심은 성경의 문자 뒤에 숨겨진 의미를 찾고자 했으며 이 의미가 성경의 진정한 영적인 의미라고 했다.
그러나 안디옥 학파는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를 기초해서 보다 더 깊은 영적인 의미를 찾고자 했다.
그러나 칼빈은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가 성경의 자연스럽고 진짜 의미라고 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 깊이 묵상해야 할 질문은 과연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 뒤에 숨은 영적인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문자적인 의미 이상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가? 칼빈에 의하면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가 진정한 의미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했다.
칼빈에 의하면 알레리칼 해석의 문제는 성경의 영적인 의미를 찾는 것에 있지 않고 문맥에 없는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데 문제가 있다. 예를 들면 어거스틴의 선한 사마리아 비유에 대한 알레고리칼 해석에서 볼 수 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여리고로 여행하던 사람은 아담이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하늘 도성이다.
아담은 그 축복으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여리고는 달을 의미하면서 인간의 도덕성을 상징한다.
왜냐하면 달은 만삭되었다가 반달이 되고 결국에는 기울고 마는 특징을 가졌기 때문이다.
아담을 공격한 도적들은 마귀와 그의 졸개들이다.
저들이 아담을 때리고 옷을 벗긴 것은 그의 도덕성을 갈취하고 죄를 짓게 만든 것이다.
그들은 그를 거의 죽은 상태로 내어버리고 떠났다. 그를 도와주지 아니하고 그냥 지나간 제사장과 레위인은 구원을 가져오지 못하는 구약의 제사장과 사역자들이다. 사마리아인이란 말은 보호자란 뜻이 있다.
따라서 사마리아인은 예수님 자신을 일컫는 것이다. 상처를 싸매는 것은 죄를 덮음을 의미하고, 기름은 소망의 위로를 의미한다. 그리고 포도주는 열심히 일할 것에 대한 권고이다.
인간을 태운 짐승은 인간 가운데 오신 그리스도의 성육을 믿음을 의미한다.
그 사람이 옮겨진 주막은 하늘 도성으로 돌아가는 순례자들의 발걸음을 잠시 쉬게 하는 교회를 상징한다.
그리고 선한 사마리아인이 여관 주인에게 준 동전 두 개는 이생과 장차 오는 생에 대한 약속이거나 교회에 준 두 성례를 의미한다. 여관 주인은 사도 바울이다.
칼빈이 안디옥 학파의 테오리아 즉 문자적인 의미에 기초해서 더 깊은 영적인 의미를 찾으려고 시도한 이들의 통찰력을 높이 사고 있지만 칼빈에 의하면 문자적인 의미가 진정한 성경의 의미이다.
이 문자적인 의미는 단수하고 자연스러운 의미라고 했다(갈 4:21주석).
3.성경 해석자로서 성령의 성경적인 기초
성경의 유일한 해석자는 성령이라는 말은 딤후 3:16에 기초하고 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성경이라는 희랍어 원문은 그라페로(γραφη)써 기록 혹은 글자라는 의미인데 어떻게 히브리어나 헬라어로 된 글자나 기록이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기 때문에 성경을 기록한 분은 인간이 아니라 성령이다.
따라서 성경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며 올바른 성경해석은 성령이 해석자를 감동시키고, 가르쳐 주어야 성경을 올바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성령은 해석자로 하여금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게 하는가?
이것이 성령의 내적조명이다.
4. 성령의 내적 조명과 해석자의 지평
전통적으로 고대 해석학은 고대 문서의 이해를 위한 규칙들의 공식화에 있었다. 해석자는 문법, 어휘, 문체들을 포함한 텍스트의 언어의 이해로부터 출발했다.
즉 텍스트(text)의 언어적, 문화적, 역사적 문맥(context)을 조사함으로서 해석이란 역사적인 맥락에서 규정된다고 봤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텍스트의 이해란 텍스트(text)와 콘텍스트(context) 사이의 관계성에서 이루어진다고 본다. 따라서 해석이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쌍방적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해석이란 단순히 텍스트를 설명하는 기술이 아니라 텍스트를 이해하는 과정에 중점을 둔다.
그래서 이해란 항상 과정 속에 있는 것이지 해석함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해석이란 텍스트에 대한 일방통로가 아니라 쌍방적이다. 여기서 해석에 있어서 두 지평이라는 말이 떠오르게 된다. 여기서 두 지평이란 텍스트(text)와 콘텍스트(context)의 관계성을 의미하며 해석이란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상호관계성 속에서 이루어진다. 콘텍스트는 텍스트의 문맥으로서 텍스트의 이해는 콘텍스트에 의해서 파악된다. 그런데 해석이란 진공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상황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해석에 있어서 어떤 해석자도 어떤 관점 혹은 선입견을 가지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해석에 있어서 전제조건이다. 가령 성경에서 구원이라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리서" 구원에 관한 지식을 가져야 구원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미리서" 지식을 선이해 혹은 전이해, 선입견, 관점, 혹은 안경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미리서" 지식이 없으면 해석이란 불가능하다.
미리서 지식을 통해서 해석은 시작되고 해석자가 가지고 있는 미리서 지식은 우리가 살아오는 과정에서 형성된 어떤 안경, 지평, 관점이라고 말해진다. 그래서 자유주의 안경이 다르고 보수주의 안경이 다르다.
안경이 다르기 때문에 다르게 해석한다. 가령 안경이 때가 끼면 잘 사물을 잘 볼 수 없는 것처럼 성경을 해석하는 안경이 흐려있으면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우리는 죄로부터 완전하게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의 안경은 항상 흐려져 있다.
따라서 우리의 안경을 깨끗하게 닦아야 하는데 이 닦는 역할을 하는 것이 성령의 조명이이다.
5.성령의 내적조명의 실재
성령의 조명은 성경에 대한 새로운 계시가 아니라 해석자의 지평을 조명한다는 말이다. 어떻게?
조명방법은 우리의 이성(νουs), 마음(καρδια), 눈, 귀를 조명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눅 24:45. 예수님이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마음을 연다는 말은 마음이 아니라 원문에는 정신(νουs)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희망이었는데 그분이 힘없이 십자가상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정신이 사실 나가버렸다.
그래서 주님이 정신을 차리게 하여 성경을 깨닫게 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이 제자들의 정신을 차리도록 해서 성경을 이해하도록 했음을 알 수 있다.
성령은 정신 혹은 우리의 이성을 깨우쳐서 성경을 깨닫게 하신다.
이것이 성령은 우리의 내적 선생이라는 말이다.
눅 24:32에 보면 우리 주님이 성경을 열어서 제자들에게 말하실 때에 제자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했다.
마음(καρδια)을 뜨겁게 하신다. 성경을 읽고 마음이 뜨거워져야 순종하게 된다.
마음을 "뜨겁게" 하는 것도 세상적인 지식이나 어떤 수단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이다.
성령이 우리를 조명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때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킨다.
성령이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게 한다.
눅 24:31에 의하면 제자들은 예수님도 알아보지 못했지만 우리 주님이 성경을 가르쳐주시고 함께 먹고 마심으로써 눈을 열어 예수님을 보게 하셨다. 성령이 우리의 영적인 눈을 열어서 성경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하시고, 성령이 우리에게 들을 귀를 주어서 성경을 하나님으로 말씀으로 듣게 하신다.
이것이 성령의 내적조명이다.
6. 성경의 진정한 의미: 자연스럽고 명료한 의미
올바른 성경해석은 성경의 명료하고 간결한 의미를 들어내는 것이다.
성경의 진정한 의미는 간결하고 자연스러운 의미이다 (갈 4:24 주석). 칼빈은 이렇게 주석했다.
저들은 말하기를 성경은 비옥하다. 그래서 성경은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나는 성경이 모든 지혜의 근원이며, 지극히 풍성하여 다함이 없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나는 성경의 풍부함이 아무나 제 마음대로 연출해 내도 괜찮은 해석상 다양함을 허용하는 것으로는 결코 생각지 않는다.
우리는 성경의 참 뜻은 단순 소박한(자연스러운) 것(verum sensum scripturae, qui germanus est et simplex)임을 알아야한다. 그리고 단순 소박한 의미를 받아드려 그것을 굳게 지키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문자적인 의미(a literal sensu)에서 멀어지게 하는 그런 허구적인 해석은 같은 것은 다만 의심스럽기 때문에 그것을 취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위험한 퇴폐물이기 때문에 대담하게 배척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자적인 의미의 중요성에서 마 16:18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고백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했다.
여기서 이 고백은 로마카톨릭에서 말하는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운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는 그리스라는 고백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내 교회라는 말이 아주 중요하다.
진정한 교회는 성도가 세울 것도 아니요 목사가 세운 것도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고백위에 세우시기 때문에 내 교회라고 했다. 그래서 여기서 "내"라는 문자적인 의미를 우리가 깊이 받아드리는 것이 교회를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하다.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가 성경의 진정한 의미이다.
과연 우리가 성경이상 더 말할 수 있는가? 초대교회 해석에서는 문자 뒤에 있는 영적인 의미를 찾으려는 알레고리칼 해석과 문자적인 의미를 기초해서 더 깊은 의미를 찾으려는 안디옥학파가 아니라 칼빈의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가 진정한 성경의 의미라고 봤다. 이문자적인 의미는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이다.
가령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양이지 염소라고 볼 수 없다.
성경의 자연스럽고 명료한 의미를 "우는 자는 복 있다"는 산상수훈의 설교에서 이렇게 드러냈다.
그런데 사실상 울려는 사람들은 많이 있을 수가 있다.
그러나 이들의 눈물이 야수의 표호와 같거나 또는 황소가 울부짖을 때 두들겨 맞거나 암소가 비명을 내지를 때, 등 같은 여러 종류의 눈물이라면 이것은 무엇인가? 내가 언급했던바와 같이 그들은 표효할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 눈물을 흘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의 눈물이 상달되어야할 곳이 바로 거기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다윗이 말한 말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주여, 당신은 병에다 나의 눈물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주여, 당신은 병에다 나의 눈물을 담으셨나이다.
우리가 고귀한 항수 또는 큰 댓가를 치룬 어떠한 향유 한 방울과 같은 눈물을 흘릴 때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간직해두신다고 다윗을 말하고 있다.
눈물은 땅에다 떨어지거나 아니면 우리가 손으로 눈물을 닦아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울 때 그것은 분명히 한 방울도 상실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하나님은 전부 다 조심스럽게 간직하실 것이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이 말씀은 우리에게 이와 같은 위로를 받도록 인도하고 있다.
7. 성경 해석의 목표
칼빈은 로마서 주석에 대한 시몬 그레네우스(희랍어와 라틴어 교수인)에게 보낸 헌사에서 "명료한 간결성"(perspicua brevitas)이 주석자가 가져야 하는 가장 좋은 미덕(αρετη)이며 성경해석의 목표는 저자의 의도(mens scriptoris)를 들어내는 것(to lay open/expose)이다.
여기서 저자의 의도는 성경의 의도를 말한다. 성경의 의도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것은 우리는 신학적으로 구속사적인 해석이라고 한다. 여기서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가 올바른 의미를 가진다.
8. 성령의 감화력과 경건
칼빈은 “그러나 완벽하고 모든 면에서 신앙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모든 올바른 이해는 바로 이 순종에 의해서 태어난다”(Omnis recta cognitio Dei ab odedientia nascitur)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그러나’는 앞의 말에 연결된다. 칼빈은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만 성경 밖에서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자들은 어리석은 자라고 했다. 그러나 성경 안에서 참된 하나님의 지식을 가지려고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서 시작해야하며 그 말씀을 경외심을 가지고 순종해야 함을 강력하게 역설한다.
칼빈에서 경건이란 하나님과 나의 관계성을 설정지우는 말이다.
자식과 부모의 관계에서 효가 자식과 부모의 관계를 설정지우는 것처럼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성은 경건으로 특성지워진다. 효가 없으면 불효자식인 것처럼 경건이 없으면 날나리 신자이다.
칼빈에서 경건이란 하나님의 은혜가 경건을 일으키며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사랑으로 정의 된다.
두려움과 사랑이 없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경건이 없이는 올바른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불가능하며 성경이 계시된 대로 순종함으로 모든 올바른 성경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여기서 경건의 역할은 성경해석방법이라기보다는 성경해석자가 가져야 할 자질을 말해준다.
따라서 성령의 감화력과 성경 깊은 이해는 해석자의 경건에 비례한다.
경건이 성경해석에서 중요한 것은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경건)하게 하여 성경의 깊은 의미를 깨닫게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경건이 성경해석에 미치는 중요한 포인트이다.
요한 8:31-32에 보면 “너희가 내 말 안에 거하면(살면/순종) 참으로 내 제자이며 진리(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될 것이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죄와 죄의 세력) 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말씀에 거하면 이라는 조건절에 안에 있는 말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경건)하지 않으면 진리도 모르고 자유함도 누릴 수 없다는 말이다.
어떻게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될 수 있는가? 많이 배움으로인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함(abide in/ dwell in)으로써 이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생활이 중요하다.
말씀 안에 사는 생활이 경건한 생활이다.
경건한 생활이 없으면 참 제자도 될 수 없고 진리도 모르며 자유함도 가질 수 없다.
다시 말하면 경건하게 사는 자가 예수님의 참다운 제자이다. 경건하게 살면 진리를 알 수 있다.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자유롭게 살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경건)하면 그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가령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경외한다는 말의 의미를 깊이 깨달았으며 여호와이레의 신앙을 배웠다.
딤전 6:4-5 보면 경건이 없을 때 마음이 부패해진다, 그래서 진리를 알 수 없다고 했다.
여러 가지 도덕적인 해이가 온다. 딤전 4:7에도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하라고 했다.
경건은 모든 것에 유익하다고 했다. 여기서도 경건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은 없다고 했다.
경건은 말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배운다.
성령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경건)함으로 성경의 깊은 의미를 알고 우리의 삶을 변화시킨다.
삶을 변화시키는 방법은 많이 배우는 것이라기보다는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배워야 한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도 열매를 100배, 60배, 30배를 맺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한다(막4:14-20).
9. 결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졌다. 따라서 성경의 진정(유일한)한 해석자는 성령이다.
성령이 해석자의 지평을 조정하고 해석자의 학문, 경건을 쓰셔서 하나님이 성경에서 의도하시는 의미를 들어내게 한다. 성경의 진정한 의미는 문자적인 의미이다.
성경해석자로서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성경을 절대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고, 듣고, 이해하게 하여 순종하게 한다. 여기서 순종하게 만드는 것이 경건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없다. 순종을 통해서 우리의 삶이 변한다. 이 삶의 변화가 성경의 깊은 이해이다. 이 과정에서 성경의 깊은 이해는 시작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