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원의 행복
광주지산교회 박형동 장로/ 시인
지난 여름의 끝자락에 나는 새로 발간한 네 번째 시집을 지인들에게 부치러 우체국에 갔다. 내 앞에서 한 아주머니가 우편물을 부치고 있었는데, 그 우편물 중량을 계산하던 직원이 4,300원이라고 말했다. 아주머니는 지갑을 다 뒤져서 4,000원을 꺼내더니 무안한 듯이 말했다. 300원이 부족한데 집에 가서 가지고 다시 오겠다고.... 직원은 난처한 표정으로 아주머니를 쳐다보면서 머뭇거렸다.
뒤에 서 있던 내가 말했다. "아주머니! 여기 300원이 있습니다. 제가 낼게요." 했더니 아주머니는 그럴 수 없다면서 집에 다녀오겠다고 했고, 나는 날씨도 더운데 어떻게 집에까지 다녀오시겠냐고 하면서 500원짜리 동전을 창구로 내밀었다. 아주머니는 몇 번이나 고맙다고 하면서 담에 기회 있으면 갚겠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냥 웃기만 했다.
돌아오면서 나는 좋은 기회를 잃었다는 것을 알았다. 차 속에 시집 몇 권이 있었으니까 고마우면 대신 이 책을 읽으시라고 하면서 드렸으면 나의 열렬한 독자가 되었을 텐데....역시 난 순발력 있게 머리가 돌아가지 않나 보다.
그래도 나는 기분이 좋았다. 300원으로 산 행복치고는 너무나 소중한 행복이기 때문이다. 그 아주머니도 아마 행복한 오후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따지고 보면 우리가 행복의 대가로 지출하는 비용은 의외로 적다는 것을 알았다.
크리스마스가 지난 12월 27일 토요일이었다. 혼자 사시던 권사님 한 분이 유족도 없이 돌아가셔서 장례예식장에 가기 위해 사람들이 교회로 모여들었다. 막 출발하려는데 허수룩한 청년 한 사람이 교회로 들어와 사무실을 찾았다. 구걸을 온 모양이었다. 누군가가 사무장이 어디 가고 없다고 하면서 그냥 돌려보내려 했고, 그 청년은 뭐라고 사정을 계속하는 모양이었다. 청년은 커피라도 한 잔 줄 수 없냐고 물었다. 앞서 차에 탔던 사람들이 재촉하는 바람에 모두들 지금 바빠서 커피를 타 드릴 수 없다고 하면서 서둘러 차 쪽으로 달려갔다.
나도 뒤따르려다 왠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호주머니를 뒤져 동전 300원을 꺼내 가지고 교회 앞 자판기에서 커피 한 잔을 뽑아주었다. 그제서야 청년의 얼굴이 밝아지더니 “기분이 참 좋다”고 말했다. 나는 “그래요?” 라고 대꾸하면서 돌아서려다가 지갑을 열어보았다. 1,000원 짜리 하나와 10,000원짜리가 있었다. 나는 1,000원짜리를 만지작거리다가 10,000원짜리를 꺼내 주었다. 청년은 연신 고개를 숙여 고맙다고 인사를 하였다. 나는 기분 좋은 마음으로 장례식장으로 갈 수 있었다.
사람이 살다보면 자기 뜻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다. 큰 꿈을 꾸기도 하고 열심히 노력하기도 한다. 또 목표를 향해 자신 있게 달려가기도 한다. 그러나 세상은 사람의 생각만큼 만만한 것이 아니다. 시시때때로 시련의 파도는 밀려오고 좌절과 실패 앞에서 절망하기도 한다. 세상 사람들은 등을 돌리고 돌아보지 않는다. 철저하게 외롭고 힘겨운 싸움을 해야만 한다. 그럴 때면 부드러운 미소나 말 한 마디가 큰 힘이 되기도 하고, 한 잔의 따뜻한 커피가 절망에서 그를 일으켜 세우기도 한다. 인간은 그런 존재다.
여느 겨울보다 춥고 배고픈 겨울이다. 한 해가 저물고 한 해가 다가오는 시점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둠과 절망과 외로움 속에서 이웃의 따뜻한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까? 나는 재벌도 아니고 부자도 아닌, 그저 한 달 한 달을 어렵게 채워나가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내 손에는 그런 이웃에게 나누어 줄 것이 들려져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찬바람이 불어오더니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옷깃을 세우고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내 곁은 스쳐간 아줌마와 청년의 표정이 어른거린다. 참 포근하다.